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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미령에서 시작된 희생의 역사

기사승인 26-05-2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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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7화-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죽미령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6·25 전쟁이 발발된 10일 만에 북한군과 미군이 처음으로 교전한 전투이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뒤흔든 비극이었다. 스미스 미 특수임무부대는 오산 죽미령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지연하려 했으나, 큰 피해를 보고 후퇴했다. 지금은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과 유엔군 초전기념관에서 전투의 의미와 희생을 기리고 있다. 

죽미령 전투의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와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대한민국(이후 남한)을 침공하였다. 당시 국군은 중화기와 전차가 부족했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하였다. 북한군은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였다.
 
 
오산 죽미령 전투 기념비. 사진=대한역사문화원 제공
 
 
미국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즉각 개입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주둔한 미군 역시 전투 준비 상태가 충분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축과 예산 삭감으로 인해 훈련 수준과 보유 장비가 크게 약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급히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일부를 한반도로 투입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북한군과 지상전을 벌인 부대가 바로 미 제24보병사단의 일부로 편성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였다. 이들은 부산에 도착한 후 대전역을 거쳐 오산으로 이동했다. 7월 5일 경기도 오산 북쪽 죽미령 고개에서 첫 전투를 치뤘고, ‘죽미령 전투’로 불린다.

이 전투는 군사적 측면에선 후퇴와 희생으로 끝났지만,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며, 유엔군 증원 시간을 벌어준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전투였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임무를 수행한 젊은 장병들의 희생과 인간애는 오늘날까지 깊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1950년7월2일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부대.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미 육군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일부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부대 지휘관은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었다. 부대 규모는 540명 정도였고, 6문의 105밀리 포가 함께 왔다. 스미스 중령은 제2차 세계대전 시 과달카날 전투에서 대대를 지휘한 경험 많은 장교로 일본 규슈 구마모토 우드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대 장병들의 실전 경험은 부족했고, 장비는 노후화되어 북한군 전차를 상대할 대전차 무기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당시 병사들은 우리가 북한군을 막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명령에 따라 한국으로 향했다. 당시 미군은 일본을 통제하는 군정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전투 훈련은 거의 하지 않았다. 미군은 북한군에게 “미국이 참전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전환점을 만들고자 했다.

오산 북쪽 죽미령에 방어선 구축

1950년 7월 5일 새벽,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경기도 오산 북쪽 죽미령 고지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지역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주요 도로 축선이었으며, 북한군의 남하(南下)를 지연시키기에 적절한 위치였다. 미군은 도로 양쪽 언덕에 기관총과 박격포를 배치하고 북한군을 기다렸다. 당시 미군 병사들은 1인당 120여 발의 실탄만 들고 전투에 임했다.

아침 8시경, 북한군 제4사단은 T-34 전차(Tank)를 앞세우고, 도로를 따라 남진했다. 미군은 75mm 무반동총과 2.36인치 대전차포로 공격했지만, 북한군의 전차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미스 부대는 전차 4대를 파괴했지만, 최신식 전차로 무장한 5천여 명의 북한군을 상대로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대전차포를 맞고도 돌진해 오는 적의 전차를 상상해 보자! 미군 병사들은 큰 충격(panic)에 빠졌다. 그러나 두려움도 잠시 그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웠지만, 북한군 보병은 수적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미군은 전투 초기 북한군에 상당한 피해를 주며, 진격을 늦추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군 탄약이 부족해졌고, 북한군의 측후방 공격이 이어지면서 미군은 포위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스미스 중령은 6시간 만에 더는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자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후퇴할 때 통신이 끊기고, 차량은 파괴되면서 많은 병사가 흩어졌지만, 끝까지 부상병을 부축하며 철수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의 젊은 생명 181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와 본 적도 없고,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땅, 전투 장비도 제대로 갖추기 전에 무전기까지 고장이 나면서 지원 사격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싸웠다. 죽미령 전사자 중에는 10대 소년 형제인 랜섬과 버질 월포드(16살·18세)도 포함되어있다.

한편 북한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보았고, 남하 속도는 지체됐다. 미국의 신속한 참전은 북한군 내부에 혼란을 주었다. 이 전투를 통해 미국은 북한군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었고, 미군은 대규모 증원과 장비 보강에 나섰다. 결과적으론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는 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유엔군 초전기념 및 미 스미스부대 전몰용사 추도식
 

첫 전투 속 감동적인 이야기

죽미령 전투는 남-북 간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인간의 용기와 희생정신이 드러난 전투이기도 하다. 후퇴 명령이 내려졌을 당시 전장은 큰 혼란 상태였다. 포탄이 떨어지고, 기관총 사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부 병사들은 살기 위해 급히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미군 병사들은 부상당한 전우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어떤 병사는 어깨에 부상병을 메고 언덕을 내려왔고, 또 다른 병사는 다친 동료를 끌어안고 함께 이동했다. 적의 총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혼자만 갈 수는 없다라는 마음으로 옆의 전우를 지켰다. 이러한 모습은 전쟁 속 인간애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었다.

피난민들은 죽미령 전투를 전·후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그중에는 가족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당시 일부 미군 병사들은 자신들의 식량을 굶주린 한국 아이들에게 나누어 줬다고 전해진다. 특히 한 어린 소녀에게 초콜릿과 전투식량을 건네며, 달래주던 병사의 이야기는 지금도 전쟁의 비극 속에서 따뜻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 병사는 곧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을 알았지만, 공포 가운데서도 아이를 먼저 위로했다.

 죽미령 전투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 

죽미령 전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미군의 첫 지상전이었다. 이 전투는 미국이 6·25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음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미국은 본토와 직접 관련 없는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피를 흘리고, 한반도 방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신호를 보내며, 자유 세계의 책임을 행동으로 입증했다. 이는 한미동맹이 “피로 맺어진 동맹(Blood Alliance)”이라는 의미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 전쟁 준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당시 미군은 장비 부족과 훈련 미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6·25전쟁 초기 남한과 미군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에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죽미령 전투는 군사대비태세의 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고 있다. 평화를 지키려면, 강한 국방력과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죽미령 전투 현장 스케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규모가 작은 부대였지만, 이들의 희생과 6시간의 지연전은 전쟁 전체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작은 희생이 역사를 바꾸는 법이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자 매년 7월 초에 기념행사를 한다.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이 북한군과 첫 교전을 가졌던 오산 죽미령고개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세워진 국가수호 현충 시설이자 공립박물관이다. 1950년 7월 5일 유엔군 지상군이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던 오산 죽미령 전투 터에서 2013년 4월 개관하였다. 참고로 죽미령 전투는 유엔군사령부가 1950년 7월 7일 출범했기에 ‘유엔군 초전’은 아니지만, 광범위하게 해석해 ‘유엔군 초전기념관’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스미스 평화관은 2020년 공원으로 건립되어 전망대, 기억의 숲, 잔디마당, 평화 놀이터 등 방문객들이 평화로운 여가를 보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오산 죽미령 전투는 후퇴한 전투이지만, 역사적으론 매우 큰 의미를 지닌 전투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장병들은 열악한 장비와 압도적인 적의 우세 앞에서도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며 시간을 벌었고, 혈맹의 초석이 되었다. 그들의 희생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값진 헌신이었고, 부상병을 끝까지 돌보며, 전쟁터 속의 아이들을 도운 노력들은 인간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름 없이 싸운 수많은 사람의 헌신·희생·봉사 덕분이다. 죽미령 전투는 국가를 지키는 책임, 대비(준비)의 중요성,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6.25 전쟁 참전용사들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보낸다. Freedom is not FREE.

정삼열 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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