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6화-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1950년 6월 25일, 무너져 가는 전선과 달리 바다 위에서는 단 한 척의 배가 국가의 운명을 붙들고 있었다. 국민 성금으로 마련된 ‘백두산함(PC-701)’은 열세의 장비와 제한된 탄약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특수부대를 태운 ‘무장 수송선’을 격침하며, 대한민국 해군 최초로 승리를 만들어 냈다.
전쟁의 새벽, 바다 위의 단 한 척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반도는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순식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상 방어선이 급속히 무너지면서 국가는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육군 중심의 방어체계에 의존하였고, 해군력은 극히 미약한 수준이었다. 실질적으로 해상에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함정은 ‘백두산함 (PC-701)’ 한 척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한 척의 배가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인 역할을 했다.
전쟁의 새벽, 바다 위의 단 한 척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반도는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순식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상 방어선이 급속히 무너지면서 국가는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육군 중심의 방어체계에 의존하였고, 해군력은 극히 미약한 수준이었다. 실질적으로 해상에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함정은 ‘백두산함 (PC-701)’ 한 척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한 척의 배가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인 역할을 했다.
|
대한해협의 밤, 운명을 건 추격
전쟁이 발발한 당일 밤, 부산 앞바다에서 초계 중이던 백두산함은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남하하는 수상한 선박을 포착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그 배는 약 600명의 북한군 특수작전부대를 태운 무장 수송선이었다. 부산에 상륙해 후방을 교란 및 보급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계획대로 상륙에 성공했다면, 유일한 전략적 거점이던 부산은 치명적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낙동강 방어선의 형성 자체가 어려워졌을 가능성이 컸다.
백두산함은 주저하지 않았다. 야간이라는 불리한 조건과 레이더조차 없는 열세한 상황에서도 즉각 추격과 교전을 결심했다. 문제는 화력이었다. 백두산함이 보유한 실탄은 약 100발에 불과했고, 장병들은 나무로 만든 모형 포탄으로 훈련한 경험이 전부였다. 결국, 이러한 조건에서 선택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적선에 최대한 근접해 명중률을 높이는 즉, 생존을 담보로 한 결단이었다.
1km의 결단, 5시간의 사투
백두산함은 적 수송선 1km 이내까지 접근했다. 적의 직사화력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거리였다. 어둠 속에서 시작된 교전은 무려 5시간 동안 이어졌다. 포성과 파도가 뒤섞인 긴 사투 끝에 6월 26일 새벽 마침내 결정적인 한 발이 적 선체를 명중시켰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적 수송선은 불길에 휩싸였고, 곧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렇게 대한민국 해군은 6·25전쟁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대한해협 전투’로 기록되었다.
이 승리는 단순한 전술적 성과를 넘어 전략적 의미를 지녔다. 완전무장한 북한군 병력 600여 명이 상륙하기 전에 제거함으로써 부산 교두보의 안정을 확보하였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결정적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
그러나 승리의 이면에는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김창학 하사와 전병익 중사는 치열하게 교전하면서 중상을 입었으나, 끝까지 조타를 놓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그들이 남긴 마지막 질문은 단 하나였다. “적함은…?”, “격침했다”라는 답을 듣는 순간, 그들의 눈빛을 빛내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끝까지 싸우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미완의 외침은 바다 위를 맴돌았다. 오늘날 해군 함정인 ‘김창학함’과 ‘전병익함’은 그들의 이름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
한 척의 배, 국민이 만들다
백두산함의 이야기는 전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시작 또한, 감동적이다. 초대 해군 참모총장(손원일 제독)은 전투함 확보를 위해 정부에 예산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해군 장병들과 가족들이 직접 나섰다. 장병들은 월급 일부를 성금으로 자진 기부했고, 간부들의 가족은 삯바느질과 바자회를 통해 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은 국민적 참여로 확산하였고, 불과 4개월 만에 1만 5천 달러를 모았다.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이 지원을 결단하면서 총 6만 달러로 4척의 함정을 확보하였다. 그중 한 척이 바로 450톤급 백두산함이었다. 단순한 무기 도입이 아니라 국가 생존 의지가 집약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구매 당시 백두산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기된 고물선 중 하나였다. 전투를 위한 함포가 없어서 하와이에서 추가로 3인치 포를 설치했다. 귀국 직전에 괌에 들러서 포탄 100발도 구매했다.
백두산함은 대한해협 전투 이후에도 해상 초계, 병력과 물자 수송 및 보호, 해상교통로 확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바다를 지켰다. 1959년 퇴역 이후 함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상징성과 의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해군사관학교에 보존된 백두산함의 돛대(mast)는 그날의 결단과 희생을 소리없이 증언하고 있다. 전쟁기념관에 가면 백두산함의 3인치 포와 같은 유형의 포를 볼 수 있다.
전쟁은 ‘의지’로 바뀐다
결국 백두산함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쟁의 승패는 단순히 전력의 규모로 결정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 준비된 전력을 얼마나 과감하게 투입하느냐에 달려 있다. 백두산함은 돈이 아니라 의지로 확보된 전력이었고, 그 의지는 전쟁 첫날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백두산함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필요한 위치에 있었다. 70여 년 전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 특수군 600여 명을 수장시킨 자랑스러운 해군에 큰 박수를 보낸다. Freedom is not FREE.
백두산함은 주저하지 않았다. 야간이라는 불리한 조건과 레이더조차 없는 열세한 상황에서도 즉각 추격과 교전을 결심했다. 문제는 화력이었다. 백두산함이 보유한 실탄은 약 100발에 불과했고, 장병들은 나무로 만든 모형 포탄으로 훈련한 경험이 전부였다. 결국, 이러한 조건에서 선택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적선에 최대한 근접해 명중률을 높이는 즉, 생존을 담보로 한 결단이었다.
1km의 결단, 5시간의 사투
백두산함은 적 수송선 1km 이내까지 접근했다. 적의 직사화력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거리였다. 어둠 속에서 시작된 교전은 무려 5시간 동안 이어졌다. 포성과 파도가 뒤섞인 긴 사투 끝에 6월 26일 새벽 마침내 결정적인 한 발이 적 선체를 명중시켰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적 수송선은 불길에 휩싸였고, 곧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렇게 대한민국 해군은 6·25전쟁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대한해협 전투’로 기록되었다.
이 승리는 단순한 전술적 성과를 넘어 전략적 의미를 지녔다. 완전무장한 북한군 병력 600여 명이 상륙하기 전에 제거함으로써 부산 교두보의 안정을 확보하였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결정적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그들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
그러나 승리의 이면에는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김창학 하사와 전병익 중사는 치열하게 교전하면서 중상을 입었으나, 끝까지 조타를 놓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그들이 남긴 마지막 질문은 단 하나였다. “적함은…?”, “격침했다”라는 답을 듣는 순간, 그들의 눈빛을 빛내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끝까지 싸우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미완의 외침은 바다 위를 맴돌았다. 오늘날 해군 함정인 ‘김창학함’과 ‘전병익함’은 그들의 이름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
한 척의 배, 국민이 만들다
백두산함의 이야기는 전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시작 또한, 감동적이다. 초대 해군 참모총장(손원일 제독)은 전투함 확보를 위해 정부에 예산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해군 장병들과 가족들이 직접 나섰다. 장병들은 월급 일부를 성금으로 자진 기부했고, 간부들의 가족은 삯바느질과 바자회를 통해 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은 국민적 참여로 확산하였고, 불과 4개월 만에 1만 5천 달러를 모았다.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이 지원을 결단하면서 총 6만 달러로 4척의 함정을 확보하였다. 그중 한 척이 바로 450톤급 백두산함이었다. 단순한 무기 도입이 아니라 국가 생존 의지가 집약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구매 당시 백두산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기된 고물선 중 하나였다. 전투를 위한 함포가 없어서 하와이에서 추가로 3인치 포를 설치했다. 귀국 직전에 괌에 들러서 포탄 100발도 구매했다.
백두산함은 대한해협 전투 이후에도 해상 초계, 병력과 물자 수송 및 보호, 해상교통로 확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바다를 지켰다. 1959년 퇴역 이후 함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상징성과 의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해군사관학교에 보존된 백두산함의 돛대(mast)는 그날의 결단과 희생을 소리없이 증언하고 있다. 전쟁기념관에 가면 백두산함의 3인치 포와 같은 유형의 포를 볼 수 있다.
전쟁은 ‘의지’로 바뀐다
결국 백두산함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쟁의 승패는 단순히 전력의 규모로 결정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 준비된 전력을 얼마나 과감하게 투입하느냐에 달려 있다. 백두산함은 돈이 아니라 의지로 확보된 전력이었고, 그 의지는 전쟁 첫날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백두산함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필요한 위치에 있었다. 70여 년 전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 특수군 600여 명을 수장시킨 자랑스러운 해군에 큰 박수를 보낸다. Freedom is not FREE.
정삼열 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
<저작권자 경제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