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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만에 무너진 수도 서울

기사승인 26-03-0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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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3화-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불과 사흘 뒤인 6월 28일 새벽, 서울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다. “왜 이렇게 빨리 무너졌는가” 이 질문은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이 갖는 의문 중 하나다. 흔히 한강 인도교 폭파의 혼란이나 초기 대응 실패만을 떠올리지만,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서울 조기 함락의 진짜 원인은 훨씬 깊은 곳에 있기에 단순하게 ‘지휘 미숙 또는 판단 착오’로 접근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울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아니다. 전쟁 이전부터 누적된 국군의 구조적 취약성이 한꺼번에 드러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 전쟁의 출발선부터 달랐다

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은 정규군 20만여 명에다 소련식 정규군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게임-체인저(Game-Changer)라고 할 수 있는 T-34 전차 242대, 자주포와 중포병 2,500문 등으로 무장했다. 여기에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전투기 220여 대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기갑·보병 협동 전술이 가능한 현대식 공격군이었다.

북한군은 서울을 조기에 점령하기 위해 서부전선에 집중적으로 배치했고, 주요지휘관은 중공 팔로군이나, 소련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북한군 제1군단장(김웅 중장), 제4사단장(이권무 소장), 제6사단장(방호산 소장)은 중공 팔로군 또는 정치위원이었고, 제2군단장(김광협 소장), 제1사단장(최광 소장), 제3사단장(이영호 소장), 제15사단장(박성철 소장) 등은 소련군 출신이었다. 

한편, 국군은 10만 명 규모의 경무장 보병이 중심이었다.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포병은 겨우 1천 문 정도를 보유했다. 공군은 전투기를 보유하지 못했고, 정찰기 20여 대만 있었다. 즉,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공격하는 군대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보병이 중심인 군대의 대결이었다. 당시 국군은 대대급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2. 전차의 충격과 공황 효과

북한군 제105전차 여단이 의정부 축선을 돌파하자 전선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국군 보병에게 전차는 거의 ‘움직이는 요새’에 가까웠다. 일부 부대는 화염병을 투척하거나, 근접 공격을 시도했지만, 전술적 측면에서 지연하는 이상의 효과를 내기 어려웠다. 

해방 이후 국군은 치안 유지 위주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내부 반란을 진압한 경험만 있었다. 국군은 대전차포가 부족했고, 2.36인치 바주카(bazooka·휴대용 대전차 로켓탄 발사기)는 T-34 전차를 관통하기 어려웠다. 바주카를 맞고도 굉음을 내며 전진해 오는 전차를 상상해보라! 적 전차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심리적 충격 무기였다. 6·25전쟁 초기에 국군 장병들은 전차 소리만 들어도, 전차를 보기만 해도, 공황(panic) 상태에 빠졌다.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의 소련제 T-34 전차(1950.6.28). 사진=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의정부 방어선은 적 전차로 인해 하루 만에 무너졌다. 피란민과 국군 장병들이 뒤엉켜 후퇴하면서 도로 사정은 더 나빠졌다. 그 와중에 “한강 인도교가 파괴됐다”는 소식에 서울 시민들의 불안감과 혼란은 더 증폭됐다. 

3. 무엇이 문제였나?

서울 방어의 관건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군의 작전개념은 처음부터 수립되지 않았고, 38도선 전역에 선형으로 배치(linear deployment)했을 뿐이다. 국지 충돌에 대비하는 배치였을 뿐, 전차 돌파를 방어하기 위한 종심 방어(depth defense) 체계가 없었다. 

반면, 북한군은 집중 돌파(concentration of force) 및 이중 포위 전략을 채택했다. 북한군 총참모부는 서울을 중심으로 ‘포위소멸구역’을 설정하며, 서울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해 한강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격멸하고자 했다. 북한군은 서울 축선에 보병 3개 사단(제1·4·3사단)을 배치하고, 고속기동 부대인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했다. 또한, 제6사단은 개성-김포 축선으로, 제2사단은 춘천-가평-하남 축선으로 진출해 한강 이남에서 합류하도록 계획하였다. 제603모터싸이클연대는 홍천-수원 축선으로 진출해 수원 이남 전역(全域)을 점령하고자 했다.
 
 
북한군의 초기 공격 계획. 사진=군사편찬연구소)
 
 
이로 인해 국군의 질서 있는 지연전이 불가능해졌기에 ‘연쇄 붕괴형 후퇴’를 하게 됐다. 당시 참모총장은 예비대를 운용하지 않았고, 가용한 부대를 축차적으로 투입하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을 예비대가 없었다. 결국,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던 생도들까지 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4. 북한의 정교한 기습 vs 남한의 무기력한 대응

북한군의 남침은 단순한 국지 도발이 아니었다. 그들은 새벽을 이용한 동시다발 공격과 다축선 돌파, 집중 포병 화력, 공군 지원을 결합한 전면전이었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빌미로 대규모 병력을 38도선 일대에 배치하면서도 국제사회를 속이고자 위장 평화공세까지 병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은 극동아시아의 정세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오점을 남겼다.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하면서 1949년 6월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로 했다. 1950년 1월의 ‘애치슨 라인’ 발표는 소련·중국·북한의 오판을 자초했다. 한반도에 전면전이 발발할 가능성에 대한 전략적 신뢰와 정보가 부족했던 결과다. 
 
 
남북의 전쟁 준비 태세 비교. 그래프=장삼열 박사
 
 
북한군의 남침 징후는 여러 차례 포착되었다. 그러나 국군 지휘부는 이를 “국지적 도발 가능성” 수준으로만 판단하는 우를 범했다. 군은 적의 징후에 따라 1950년 초부터 비상 체제를 유지하며, 대비 태세를 강화했지만, 6월 24일 비상대비태세를 해제했다. 계속된 비상대비태세 유지로 장병들의 피로감이 높았고, 농번기 모내기 철을 맞이해 농촌 일손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많은 장병을 휴가 보냈다. 게다가 6월 24일 저녁 육군본부 주요 직위자들은 장교클럽(현 용산 삼각지)에서 회식하는 등 대북 경계 태세마저 이완됐다. 더욱이 많은 화포와 차량은 정비하기 위해 정비창에 입고된 상태였다.

따라서 6월 25일 새벽, 전쟁이 발발했을 땐 제대로 된 지휘·통제체계가 어려웠다. 전쟁 첫날, 최전선에서는 적의 포화로 유선 통신이 끊기면서 상황 보고는 지연됐고, 명령 전파는 혼선을 빚었다. 일부 전선은 실제보다 더 빨리 붕괴한 것으로 오판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개인의 판단 실수라기보다 전시 위기관리 체계의 미성숙이었다.

5. 오늘의 안보에 주는 교훈

전쟁 초기엔 전력 구조가 승패를 좌우한다. 전략정보의 실패는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기갑·화력 대응 능력 구비가 필수 요소로서 ‘유비무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다행스럽게 어둠 속에서도 조그만 불빛이 나타났다. 춘천 대첩과 대한해협 전투의 승리였다. 춘천 축선을 방어한 제6사단의 선전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대한해협 전투에서 백두산함의 승리는 후방 주요 항구를 교란하려는 북한 특수군(600명)으로부터 부산 일대의 주요 항구를 지켜냈다. 초기 72시간은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미완성된 대한민국이 전면전을 경험하며, 체계를 재편하는 고통의 과정이었다.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된 것은 장병들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 국군 장병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문제의 본질은 개인의 용기가 아니라 국가 군사 체계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역사는 “전쟁의 초기 72시간은 평시 10년의 준비가 만들어 낸 결과”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역사는 단죄의 대상이 아닌 교훈의 자산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장대한 분노작전(Operation Epic Fury)’을 보면서 한·미 연합훈련과 전쟁 억지력 강화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장삼열 박사는 한미연합사령부·국방부·육군 등에서 대미(對美) 정책업무와 전쟁사를 담당했다. 전쟁사, 한미동맹, 국제 평화활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육군 군사연구소 등을 거쳤다. 저서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제2보병사단사>, <현리·한계 전투(共著)>, <한미동맹 60년사(共著)> 등이 있다. 화랑무공훈장, 美 동성무공훈장(BSM) 등을 수상했다.

장삼열 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

<저작권자 경제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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