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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우발적 충돌’이었을까?

기사승인 26-02-1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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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화-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6·25전쟁이 남북 간 우발적 충동’이라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왔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내전의 확대’ 혹은 ‘냉전 구조 속의 비극’으로 바라본다. 남북 모두 책임이 있으며, 북한은 방어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공개된 구소련의 기밀문서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6·25전쟁은 우발적 충돌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집요한 요청, 스탈린의 전략적 승인, 마오쩌둥의 사전 동의가 결합된 ‘계획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한반도 내전이 아니라, 냉전 초기 공산권 팽창전략의 핵심 전장이었으며, 구소련·중국·북한의 역할 분담이 명확한 국제전이었다.

1.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구조와 한계

브루스 커밍스(Bruce Commings)의 주장은 크게 네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내전론-남북 모두 전쟁 책임이 있다. 둘째, 우발성 주장-국지 충돌이 확대된 결과다. 셋째, 남한 도발론-북한이 방어적으로 대응했다. 넷째, 미·소 대칭 책임론-냉전 구조 속에서 양측 모두 책임이 있다.

냉전기에는 자료 접근의 제약으로 주장에 따라 일정한 설득력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 외교문서보관소(AVPRF),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RGASPI) 등에서 1차 문서가 공개되며, 상황이 달라졌다.
 
 
그래픽=장삼열 박사
 
 
특히, 미국의 캐드린 웨더스비(Cathryn Weathersby) 교수가 이런 공산권 자료를 분석해 제시한 반박이 결정적이었다. 문서에는 김일성의 반복적 무력통일 요청, 스탈린의 조건부 승인,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서이다. 수정주의의 핵심 전제였던 ‘우발성’은 사료(史料)가 공개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2. 김일성, 무력통일 승인 추진

1949~1950년 사이, 북한의 김일성은 여러 차례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오갔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무력통일 승인’이었다. 즉, 즉흥적 판단이 아닌 해방 직후부터 계속된 전략적 목표였다.

김일성은 주한미군이 이미 철수해 남한은 방어가 어려운 상태라고 판단했다. 또 남한 내부에서 좌익 세력의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단기간 내 이른바 해방전쟁을 완수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모스크바에 여러 차례 전문을 보내 승인을 독촉했다. 러시아가 1994년 6월 한국 정부에 전달한 구소련 문서 216건에는 김일성의 반복된 남침 요청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 등이 기록돼 있다.

북한군은 구소련과 중공의 도움을 받아 구소련식 편제로 10개 사단을 편성했고, T-34 전차와 항공기, 야포 등을 갖추면서 작전계획 수립은 물론 사단급 훈련까지 마쳤다. 즉흥적 충돌이 아닌 전면전을 전제로 한 체계적 준비였음을 알 수 있다.

3. 스탈린, 전쟁의 설계자

북한은 당시 외교·군사·경제적으로 소련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승인 없이 전쟁은 불가능했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초기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국제 정세가 바뀌자 마음을 바꿨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의 한반도 철수,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 10월 중국공산당의 대륙 장악이라는 세 가지 변화는 스탈린에게 상당한 자신감을 주었다.

1950년 4월,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무력통일을 승인하면서 소련은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분명히 했다. 즉,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이 대응하게 함은 단순한 승인 이상의 의미였다. 전쟁의 확전 구조를 사전에 설계해서다. 스탈린은 이와 동시에 전차, 항공기, 군사고문단을 제공했으며, 작전 개시 시점까지 조율했다. 그는 전쟁의 최종 승인자이자 후방 설계자였다.
 
 
무력 남침을 결정한 마오쩌둥·김일성·스탈린. 사진=전쟁기념관
 
 
4. 마오쩌둥, ‘나중에 개입한 것’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한반도 개입을 전쟁 발발 이후의 방어적 대응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사료는 다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마오쩌둥은 전쟁 이전부터 북한의 남침 계획, 미군 개입 가능성, 중공군 투입 필요성 등을 인지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중국의 마오쩌둥을 찾아가 스탈린이 ‘해방전쟁’을 승인했다면서 중국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달라며, 이중 플레이를 했다.

이에 중국은 국공내전 전투 경험이 있는 조선족 병력 약 6만명을 비밀리에 북한으로 파견했다. 만주지역에선 대규모 병력을 집결하고, 보급선 및 후방기지를 정비하며,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을 투입할 시나리오를 준비하였다. 1950년 10월의 중공군 불법 개입은 즉흥적 결정이 아니라 사전에 합의된 확전 단계의 실행이었다.

5. ‘우발적 충돌론’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

세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전면 동시 공격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사불란하게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지 충돌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둘째, 공격명령 문서가 존재한다. 1950년 6월 18일 북한 민족보위성이 각 사단에 남침 개시를 전후해 정보수집을 명령했다. 북한군은 6월 22일 남침 준비 명령을 하달했고, 공격 개시 암호는 ‘폭풍’이었다. 셋째, 국제 공산권의 즉각적 연동이다. 소련은 외교적 엄호를 하고, 중국은 단계적으로 군사 개입을 시도했다. 이러한 흐름은 사전 합의 없이는 불가능한 속도와 정합성(Consistency)이다.
 
 
사진=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6. 왜! 이 논쟁이 중요한가? 

6·25전쟁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북한의 계획적 무력 남침’, ‘소련이 설계한 간접전’, ‘중국이 수행한 대리전’, ‘냉전 최초의 대규모 국제 무력 충돌’이는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제거하기 위한 국제 공산권의 조직적 침략전쟁이었다.

전쟁의 성격을 흐리는 것은 단순한 학술 논쟁이 아니다. 침략 책임의 상대화는 동맹의 정당성을 약화하고, 안보 판단의 구조적 오류를 가져온다.

역사는 감정이 아니라 사료와 구조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공개된 문서들이 일관되게 증명하고 있다. 6·25전쟁은 우발적 충돌이 아니었다.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이 서로 역할을 나눠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전쟁이었다. 과거를 정확히 이해할 때 미래의 안보도 정확히 설계할 수 있다.

 
 
 
 
장삼열 박사는 한미연합사령부·국방부·육군 등에서 대미(對美) 정책업무와 전쟁사를 담당했다. 전쟁사, 한미동맹, 국제 평화활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육군 군사연구소 등을 거쳤다. 저서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제2보병사단사>, <현리·한계 전투(共著)>, <건군기 및 6·25 전쟁기 국군 장교 충원에 관한 연구(共著)>, <한미동맹 60년사(共著)> 등이 있다. 화랑무공훈장, 美 동성무공훈장(BSM) 등을 수상했다.

장삼열 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

<저작권자 경제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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