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화-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장삼열 박사(육사 35기, 예비역 육군 대령)는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 박사는 6·25전쟁의 주요 전투를 중심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과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엮어 총 30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이번 연재의 첫 번째 이야기는 “6·25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로, 전쟁 발발의 배경과 초기 상황을 다룬다. 제1화부터 제10화까지는 “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제11화부터 제16화까지는 “역사를 지켜낸 결정적 전투와 에피소드”, 제17화부터 제22화까지는 “전세를 바꾼 결정적 작전”, 제23화부터 제27화까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점”, 그리고 제28화부터 제30화까지는 “멈춘 전쟁, 끝나지 않은 책임” 을 주제로 한다.
1. 전쟁의 문은 왜 새벽에 열렸는가?
북한의 남침 시각은 우연이 아니었다. 새벽 시간대는 경계태세가 가장 느슨해지는 시점이면서 일상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이다. 북한군은 이 시간대를 택해 기습효과를 극대화했다.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은 개성·철원·춘천·동해안 등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단발적 도발이 아니라 전면 침공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배치는 전면전을 상정한 형태가 아니었다. 국군은 경찰과 함께 국지적 충돌에 대비한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중화기와 기갑 전력은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반면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기계화부대를 주력으로 편성해 단시간 내 돌파하면서 종심 타격을 노렸다. 전쟁이 개시된 첫 장면부터 전력의 불균형은 명확했다.
2. 선전포고 없는 전쟁,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다
6·25전쟁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선전포고 없는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이다. 국제법상 전쟁 개시는 선전포고 또는 이에 준하는 공식 통보가 원칙이다. 그러나 북한은 어떠한 외교적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으며, 이후 유엔이 즉각적으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북한은 남침 직후 “남조선 괴뢰도당의 도발에 대한 자위적 반격”이라는 선전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실제 전황은 이 주장과 전혀 달랐다. 남한 지역에서 북한으로의 대규모 공격 징후나, 전면 공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침 이전부터 북한은 병력 증강과 전력 재편, 작전계획 수립을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김일성이 계획한 6·25전쟁은 ‘갑작스러운 대응’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공격’이었다.
3. 누가, 언제, 무엇을 준비했는가?
6·25전쟁은 한반도 내부 요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전쟁은 냉전 초기,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의 세력균형의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남침 계획을 추진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여러 차례 방문은 물론 다양한 외교적 설득을 시도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초기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이 1949년 6월 한국에서 철수하고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발표한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면서 스탈린의 태도도 바뀌었다. 때마침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중공의 마오쩌둥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1949~1950년 사이 북한군은 급속히 재편되었다. 스탈린은 소련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보내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전차·포병·항공기 등의 지원은 물론 전술훈련까지 지도했다. 전차 240여 대, 항공기 200여 대를 북한으로 몰래 보냈으며, 북한군은 약 20만 명 수준으로 남한의 국군을 압도했다. 북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군사 원조에 힘입어 사단급 훈련까지 완료하고 시기만을 기다렸다.
4. 전쟁 개시 30일 이내 한반도 적화통일?
북한의 전쟁 목표는 분명했다. 단기간 내 서울을 점령하고, 정부와 군의 지휘체계를 붕괴시킨 뒤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 것이었다. 38도선을 돌파 후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 주력부대를 섬멸하며, 남해안까지 진출하는 3단계 작전계획이었다. 일명 ‘선제타격작전계획’은 1950년 5월 29일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가 작성한 것이다. 1단계는 5일 이내에 수원-원주-삼척선에서 한국군의 주력을 포위 격멸한다. 2단계는 군산-대구-포항선에서 국군 증원 병력을 격멸한다. 마지막 3단계는 주요 항구도시를 점령해 국군 소탕 및 유엔군의 증원을 차단한다.
6월 28일 서울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함락되었다. 이는 군사적 충격을 넘어 정치·심리적 타격을 초래했다. 수도 서울의 상실은 국가 붕괴로 인식하기 쉽고, 북한은 이를 통해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 계산은 결정적 변수 하나를 간과했다. 바로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유엔의 개입이었다.
5. 유엔의 개입, 전쟁의 성격을 바꾸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 남침은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평화에 대한 침략행위’로 규정했고, 회원국들에 대한민국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이는 냉전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6·25전쟁은 단순한 내전이나, 남북문제가 아니라 국제전으로 확장되었다.
6·25전쟁은 현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한 국가의 기습 침략이 국제질서 차원에서 제재되고, 집단 안보체제가 실제로 작동한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의도했던 ‘단기 결전’은 이렇게 국제 개입이라는 벽에 부딪혀 어긋나기 시작했다.
6. 나가기
6·25전쟁의 시작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사 논쟁을 넘어선다. 전쟁은 ‘우발적 충돌’이 아닌 명확한 준비·의도를 가지고 일으킨 불법 침략행위여서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 남침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역사적 핵심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안보환경은 다시 불확실성의 시대에 들어섰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의 시작을 흐릿하게 기억해서는 안 된다. 누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시작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 그것이 다음 전쟁을 막는 첫 번째 조건이기도 하다.
6·25전쟁은 선전포고 없이 새벽에 감행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으며, 사전에 준비된 불법 침략전쟁으로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행위였다. 우리가 전쟁의 시작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한반도 안보를 지키는 역사적 기초이다.
장삼열 박사는 한미연합사령부·국방부·육군 등에서 대미(對美) 정책업무와 전쟁사를 담당했다. 전쟁사, 한미동맹, 국제 평화활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육군 군사연구소 등을 거쳤다. 저서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제2보병사단사>, <현리·한계 전투(共著)>, <건군기 및 6·25 전쟁기 국군 장교 충원에 관한 연구(共著)>, <한미동맹 60년사(共著)> 등이 있다. 화랑무공훈장, 美 동성무공훈장(BSM) 등을 수상했다.
이번 연재의 첫 번째 이야기는 “6·25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로, 전쟁 발발의 배경과 초기 상황을 다룬다. 제1화부터 제10화까지는 “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제11화부터 제16화까지는 “역사를 지켜낸 결정적 전투와 에피소드”, 제17화부터 제22화까지는 “전세를 바꾼 결정적 작전”, 제23화부터 제27화까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점”, 그리고 제28화부터 제30화까지는 “멈춘 전쟁, 끝나지 않은 책임” 을 주제로 한다.
1. 전쟁의 문은 왜 새벽에 열렸는가?
북한의 남침 시각은 우연이 아니었다. 새벽 시간대는 경계태세가 가장 느슨해지는 시점이면서 일상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이다. 북한군은 이 시간대를 택해 기습효과를 극대화했다.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은 개성·철원·춘천·동해안 등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단발적 도발이 아니라 전면 침공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배치는 전면전을 상정한 형태가 아니었다. 국군은 경찰과 함께 국지적 충돌에 대비한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중화기와 기갑 전력은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반면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기계화부대를 주력으로 편성해 단시간 내 돌파하면서 종심 타격을 노렸다. 전쟁이 개시된 첫 장면부터 전력의 불균형은 명확했다.
2. 선전포고 없는 전쟁,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다
6·25전쟁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선전포고 없는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이다. 국제법상 전쟁 개시는 선전포고 또는 이에 준하는 공식 통보가 원칙이다. 그러나 북한은 어떠한 외교적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으며, 이후 유엔이 즉각적으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북한은 남침 직후 “남조선 괴뢰도당의 도발에 대한 자위적 반격”이라는 선전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실제 전황은 이 주장과 전혀 달랐다. 남한 지역에서 북한으로의 대규모 공격 징후나, 전면 공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침 이전부터 북한은 병력 증강과 전력 재편, 작전계획 수립을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김일성이 계획한 6·25전쟁은 ‘갑작스러운 대응’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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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가, 언제, 무엇을 준비했는가?
6·25전쟁은 한반도 내부 요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전쟁은 냉전 초기,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의 세력균형의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남침 계획을 추진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여러 차례 방문은 물론 다양한 외교적 설득을 시도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초기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이 1949년 6월 한국에서 철수하고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발표한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면서 스탈린의 태도도 바뀌었다. 때마침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중공의 마오쩌둥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1949~1950년 사이 북한군은 급속히 재편되었다. 스탈린은 소련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보내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전차·포병·항공기 등의 지원은 물론 전술훈련까지 지도했다. 전차 240여 대, 항공기 200여 대를 북한으로 몰래 보냈으며, 북한군은 약 20만 명 수준으로 남한의 국군을 압도했다. 북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군사 원조에 힘입어 사단급 훈련까지 완료하고 시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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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쟁 개시 30일 이내 한반도 적화통일?
북한의 전쟁 목표는 분명했다. 단기간 내 서울을 점령하고, 정부와 군의 지휘체계를 붕괴시킨 뒤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 것이었다. 38도선을 돌파 후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 주력부대를 섬멸하며, 남해안까지 진출하는 3단계 작전계획이었다. 일명 ‘선제타격작전계획’은 1950년 5월 29일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가 작성한 것이다. 1단계는 5일 이내에 수원-원주-삼척선에서 한국군의 주력을 포위 격멸한다. 2단계는 군산-대구-포항선에서 국군 증원 병력을 격멸한다. 마지막 3단계는 주요 항구도시를 점령해 국군 소탕 및 유엔군의 증원을 차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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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서울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함락되었다. 이는 군사적 충격을 넘어 정치·심리적 타격을 초래했다. 수도 서울의 상실은 국가 붕괴로 인식하기 쉽고, 북한은 이를 통해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 계산은 결정적 변수 하나를 간과했다. 바로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유엔의 개입이었다.
5. 유엔의 개입, 전쟁의 성격을 바꾸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 남침은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평화에 대한 침략행위’로 규정했고, 회원국들에 대한민국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이는 냉전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6·25전쟁은 단순한 내전이나, 남북문제가 아니라 국제전으로 확장되었다.
6·25전쟁은 현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한 국가의 기습 침략이 국제질서 차원에서 제재되고, 집단 안보체제가 실제로 작동한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의도했던 ‘단기 결전’은 이렇게 국제 개입이라는 벽에 부딪혀 어긋나기 시작했다.
6. 나가기
6·25전쟁의 시작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사 논쟁을 넘어선다. 전쟁은 ‘우발적 충돌’이 아닌 명확한 준비·의도를 가지고 일으킨 불법 침략행위여서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 남침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역사적 핵심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안보환경은 다시 불확실성의 시대에 들어섰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의 시작을 흐릿하게 기억해서는 안 된다. 누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시작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 그것이 다음 전쟁을 막는 첫 번째 조건이기도 하다.
6·25전쟁은 선전포고 없이 새벽에 감행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으며, 사전에 준비된 불법 침략전쟁으로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행위였다. 우리가 전쟁의 시작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한반도 안보를 지키는 역사적 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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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삼열 박사는 한미연합사령부·국방부·육군 등에서 대미(對美) 정책업무와 전쟁사를 담당했다. 전쟁사, 한미동맹, 국제 평화활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육군 군사연구소 등을 거쳤다. 저서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제2보병사단사>, <현리·한계 전투(共著)>, <건군기 및 6·25 전쟁기 국군 장교 충원에 관한 연구(共著)>, <한미동맹 60년사(共著)> 등이 있다. 화랑무공훈장, 美 동성무공훈장(BSM) 등을 수상했다.
장삼열 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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